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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 담긴 의미 본문

성경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 담긴 의미

샤인피플 2025. 3. 11. 13:04

 

누가복음 10장에는 예수님의 가르침 중 특별히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나옵니다. 길을 가던 사람이 강도를 만나 쓰러졌는데, 뜻밖에도 그를 돕고 살린 사람은 사마리아인이었다는 내용이지요. 단순히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 같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강력한 충격과 도전을 주는 비유였습니다. 이 이야기의 역사·문화적 배경을 먼저 살펴보면, 예수님이 정말로 강조하고 싶으셨던 메시지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비유가 주어진 상황

누가복음 10장 25~29절을 보면,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도리어 “율법에는 어떻게 쓰여 있느냐?”라고 되물으시고, 율법교사는 “하나님을 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해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정확히 인용합니다. 예수님은 이 대답을 칭찬하시며 “이것을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때 율법교사가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라고 추가로 묻습니다. 율법상 ‘이웃 사랑’은 잘 알겠지만, 그 ‘이웃’의 범위가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논쟁이 예수님 시대에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질문을 계기로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를 들려주심으로, 기존의 편견을 완전히 뒤엎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1. 역사·문화적 배경

(1)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갈등
이 비유가 특히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사마리아인이 당대 유대인들에게 멸시와 차별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인은 기원전 722년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뒤 이방 민족과 혼합된 후손으로 여겨졌고, 예루살렘 성전 대신 그리심산에서 예배를 드리는 등 종교적 전통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들을 “믿음이 온전치 못한 이방 혼혈”로 보며 왕래조차 기피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유대 땅과 갈릴리를 오가려면 사마리아를 우회할 정도로 상호 반감이 컸습니다.

(2)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
비유가 펼쳐지는 무대, 곧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이어지는 길은 약 27km 남짓으로 협곡과 바위가 많아 강도가 자주 출몰하던 위험 지역이었습니다. 무역로이기도 해서 많은 사람이 오가지만, 중간중간 인적이 드문 구간에선 강도가 기승을 부렸다고 합니다. 이 길을 지나다 강도를 만나 크게 다치는 일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3) 제사장과 레위인
이 비유 속 강도 피해자를 가장 먼저 발견한 이들은 제사장과 레위인이었습니다. 제사장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주관하는 최고 종교 지도자이고, 레위인은 이를 보조하는 역할을 맡았던 자들입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가르침을 잘 알았을 텐데도, 강도당해 쓰러진 사람을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당시 율법에는 “시체를 만지면 부정해진다”라는 규정이 있어, 그가 이미 죽었거나 죽어 가는 중이라면 접촉을 꺼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혹은 자신들도 같은 강도를 당할 위험이 있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그들은 가장 기본적인 ‘사랑의 의무’를 외면하고 떠났습니다.

  1.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의 핵심

제사장과 레위인을 지나, 문제의 피해자를 외면하지 않은 이는 뜻밖에도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유대인과 적대적 관계에 있던 사마리아인이 강도당한 사람을 발견하고 기름과 포도주로 상처를 소독해 주며, 자신의 짐승에 태워 여관까지 데려가 돌봐 줍니다. 다음 날에는 여관 주인에게 추가 비용까지 미리 지불하면서 “더 드는 비용이 있으면 돌아올 때 갚겠다”고 약속합니다. 자기 재산, 시간, 안전, 편의를 기꺼이 희생해 낯선 이웃을 돌보았던 것입니다.

비유의 마지막에 예수님은 율법교사에게 “누가 이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라고 물으시고, 율법교사는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답합니다.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는 말씀으로 이 비유를 마무리하십니다.

  1. 현대적 적용과 교훈

(1) 경계를 넘어서는 사랑
이 비유가 가장 강하게 전하는 메시지는 “모든 경계를 뛰어넘는 이웃 사랑”입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를 멸시하고 배척했지만, 사마리아인은 편견을 내려놓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우리도 사회적·문화적·종교적 장벽을 이유로 누군가를 멀리하거나 차별하지 않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진정한 이웃 사랑은 이러한 벽을 허물고, 눈앞에서 고통받는 사람을 돌보는 구체적인 실천에서 시작됩니다.

(2) 지식이 아닌 실천
예수님께 질문하던 율법교사는 머리로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율법의 중심임을 잘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 행동으로 이어지는지는 다른 문제입니다. 비유 속 제사장과 레위인 또한 율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들이었는데, 막상 긴급한 이웃을 앞에 두고 돕지 않았습니다. 반면, 사마리아인은 율법 지식이 부족했을 수 있지만 실제 사랑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이 비유는 “알고 있는 믿음”이 아니라 “실천하는 믿음”이 진정한 신앙임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3) 비용을 감수하는 헌신
사마리아인은 쓰러진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자신의 물품을 사용하고, 여관비를 지불하며, 추가 비용까지 예비해 둡니다. 사랑은 말로만 하는 동정이 아니라, 시간과 물질, 정성을 기꺼이 들이는 헌신임을 깨닫게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누군가를 돕는 일은 때로 불편과 희생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명하심으로, 희생이 따르는 사랑이 진정한 이웃 사랑임을 강조하십니다.

(4) 지역·종교·문화의 장벽을 뛰어넘는 공동체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는 인종과 문화, 종교적 배경이 다른 이들을 모두 한 형제로 맞이해야 할 공동체입니다. 초대 교회가 사마리아 땅에 복음을 전하며(사도행전 8장), “사마리아인도 하나님 나라의 동등한 일원”으로 받아들인 것은 바로 이 정신을 보여 줍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와 성도는 나와 배경이 다르다고 해서 배척하기보다, 이웃의 어려움에 적극적으로 다가가 함께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1. 맺음말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는 단순히 “착한 사람” 이야기가 아니라,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라는 배경 속에서 “사랑의 근본 정신은 편견과 경계를 뛰어넘는다”는 놀라운 선포입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에게 “사마리아인”은 가장 멀고 싫은 존재였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그 사마리아인을 “참된 이웃”의 본보기로 제시하셨습니다.

이 비유가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넘어 “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 줄 것인가?”입니다. 혹 우리는 누군가를 향해 마음의 문을 닫고 있지 않은지, 혹은 스스로의 안전과 이익을 우선하느라 필요한 도움을 외면한 적은 없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예수님의 결론은 분명합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사랑의 실천이 얼마나 큰 희생을 요구하든, 그 길이 곧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된 길임을 이 비유는 강력하게 증언합니다.

부디 이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가 우리의 일상에도 깊은 울림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변에 도움이 절실한 이들을 볼 때, 기꺼이 손을 내미는 결단을 할 수 있는 용기와 마음이 우리에게 있길 소망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 걷는 진정한 ‘이웃 사랑’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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